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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하수구에 버리면 됩니다

이소요
Artist and Conservator

Interviewed and edited by Junghyun Kim.

김정현
안녕하세요. 이소요 작가님. <플라이 모그 Fly Morgue>(2021)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웹페이지로만이 아니라, 이렇게 작가의 육성으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생물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더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장치인 것 같습니다. 실험실은 건조하고 냉정할 것 같지만, 생이 순환하는 장소이지요. 정말 미세하고 보이지 않는 초파리의 삶의 사이클과 그것보다는 큰 부피와 무게를 가진 인간의 삶의 사이클이 같이 순환합니다.


이소요 작가가 선택한 마인드맵은 지식이나 연구가 왜 시간을 구축하는지를 잘 연결해서 보여줍니다. 김혜순 시인의 시와 이소요 작가의 작업이 만난 것은 개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지식이 만나는 시간이 되겠죠. 마인드맵의 <플라이 모그>라는 출발점에서부터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지점이 시어라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생물학적인 것들이 최근 미술의 화두가 되는 이유는, 생물학적 감각들이나 지식을 통해 인지하는 것들이 그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대에 이미지를 중대하게 생산하기 때문일 거예요. 단순히 지식의 한 카테고리로서 유행하는 것이 아니라요. 이소요 작가는 생물학적 연구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작업합니다. 그것들이 어떤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지, 어떤 시대에서 쓰였고, 누가 만들었는지를 찬찬히 살펴봐요.

<플라이 모그>의 인용구 중에 ‘세미-도메스티케이티드(semi-domesticated)’라는 개념이 나와요. 실험실의 영역이 완전히 통제된 조작된 영역이라면, 야생은 저기 멀리에 있는 자연, 인간이 닿지 않는 곳을 뜻합니다. 그런데 미술관 주변에 있는 새들을 예로 들면, 이들은 야생도, 또 완전히 도메스티케이티드도 아니죠. 이렇게 중간 영역의 개체들도 굉장히 많은데, 그 중간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많이 놓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이소요
생물학적 이미지와 중간 영역, 이 두 가지 모두 제가 항상 생각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해요. 기술적 이미지와 데이터로서 만들어지는 생물의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 제가 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완전한 야생에서 인공물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생물의 그라데이션과 관계망에 대한 이야기, 이렇게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서 질문을 이해했습니다.

올해(2021년) 『조선식물도감 유독식물편』(도봉섭, 심학진 공저, 1948)을 소재로 작업을 했어요. 그 도감을 펼치면, 왼쪽 면에는 식물 그림이 크게 들어있고, 오른쪽 면에는 그 식물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어요. 사전처럼 한 70여 종의 식물이 순차적으로 쭉 실려 있는 그런 형식을 가진 책이에요. 이 책에 등장하는 식물은 현대에 재분류가 되었거나, 학명이 조금 달라졌거나, 정확히 그 식물이 아닐 수도 있는 등,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어요. 이 도감이 나온 지 거의 70년의 세월이 지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과학적 지식은 계속 업데이트되고 변화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재검증을 해야지만, 한편 책에는 이 식물이 현대의 어떤 식물인지를 알 수 있는 여러 단서가 들어있어요. 다른 여러 책들, 지식을 가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 도감 속 생물이 남한에서 자생하는 지역을 직접 찾아가 채집하고, 그 그림이 연상되게끔 식물을 건조시켜서 보존물을 만드는 형식으로 작품화했어요.

저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과학 이미지를 비평하는 일을 주로 작업했었는데, 이번에 제가 직접 이미지를 만들면서 그들의 고충을 오히려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간, 과학적 이미지는 왜 생물을 왜곡하거나 누락하는가에 대한 비평적 관점에서, 생물 이미지가 가지는 한계에 관해 생각했었는데, 직접 제가 생물을 채취해서 한 개의 이미지로 정리해야 되는 과제를 스스로한테 부여하고 보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더라고요. 하나의 생물이 표현될 수 있는 수많은 방법과 전략과 모습들이 있을 텐데, 제가 작품이라는 결과로 만들어 놓은 그 모습이 인상적이거나 효과적일수록 그 이미지가 그 생물을 대표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기억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겠지요. 누군가 야생이나 자연에서 그 생물을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경험의 폭이 이미지로 인해 좁아질 수 있고, 저 역시 그것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돌아보게 되었었어요.

그래서 관람객에게 제가 직접 작품을 해설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여러분, 직접 나가서 이 생물 찾아보시고. 그 모습은 여기서 보는 이 모습하고 다르다. 이것이 유일한 모습이나 이 생물을 대표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라는 걸 말로 전달해 드리는데, 사실 제가 만든 시각물은 그 반대의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이것을 보아라. 이것이 이 생물이다. 이것이 이 그림에 나왔던 이 식물의 모습이다.’라는 걸 강력하게 주장하는 물건을 만들어 놓고 아무리 설명해도 역부족이라는 걸 알면서도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보는 생물의 모습들이 누군가 한 사람이 한시적으로 어떤 특정한 기준과 환경 안에 처했을 때 만들어내는 이미지일 뿐, 수없이 많은 역사 속의 다양성, 즉 생물들이 살고 있는 굉장히 다양한 생태와 관계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점을 어떻게 작품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아직 풀지 못한 과제지만 저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생물을 채집해서 전시로 보여주는 것이, 작가인 내가 그것을 어떤 이미지로 소유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물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만—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모습들을 가까이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 호기심을 가지고 더 많은 걸 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많이 보여드리려 해요.


생물의 이미지를 해석하고 다시 재생산하는 작업은 생물이 개체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런 형태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환기시켜주는, 어떻게 보면 역방향의 이미지들을 만드는 것 아닐까요?


네, 그러고 싶어요. 제가 만드는 생물 이미지가 그런 이미지였으면 좋겠어요.


이걸 어떻게 번역해야 될지도 고민인 것 같은데, 도메스케이티드와 와일드 사이의 영역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올해 그 단어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서구의 학술 분야에서도 자주 등장했어요. 조지 몽비오가 쓴 『활생(Feral: Rewilding the Land, the Sea, and Human Life. 파주: 위고, 2020)』에 와일드 개념이 잘 정리되어 있어요. 보통 ‘야생’은 인간이 길들여서 익숙해져 있는 이 사회 속의 환경과 전혀 관계없이, 사람의 손이 전혀 미치지 않고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다른 생물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아니면 지구상 인간 이외의 다른 물질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어떤 물리적인 공간과 상태와 생물들의 관계망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사실 이 지구상의 물질은 다 순환하고 있고 전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과 전혀 교류하지 않는 어떤 환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워요. 더군다나 이렇게 지금처럼 70억 인구가 지구 상에 굉장히 많은 영토를 점령하고 있는 이런 시대에요.

그래서 야생은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어떤 상태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선사시대, 인류가 존재하기 전 공룡이 살았던 어떤 시대를 상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산업혁명 이전 사람들이 많은 이동을 하지 않았을 때, 만 년까지 안 가더라도 500년 정도 사람이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 어떤 장소가 있다고 하면, 야생이라는 개념이 유효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야생과 인공을 구분하기 어려워졌어요. 또, 흰개미가 집을 짓는 것을 자연이라 하면, 인간이 건물을 짓는 것은 자연이 아닌가? 지구상에 사는 생물이 거주하기 위한 어떤 구조물을 짓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사람이 짓는 건물도 자연이고 또 개미가 짓는 집도 자연일 수 있겠죠.

인공과 자연, 야생과 길들여진 삶이 명확히 구분이 된다기보다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저는 편해요.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결벽증적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야생이고 어디가 아닌지 계속 구분을 지어야 되는데,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활생의 원제는 ‘피럴(feral)’인데, ‘야생의’라고 자주 변역돼요. 작품에 제목으로 이 단어를 가져다 쓰면서 저는 ‘풀려난’ 생물이라고 썼어요. 사람과 가까이 살다가 나름대로 자생력을 가지고 사람의 거주지를 벗어나 나름의 생태를 구축하는 사례를 많이 봐요. ‘야생’이라는 개념은 너무 절대적인 기준을 정하니까, 길들였다가 풀려난 생물의 개념으로 ‘피럴’을 이해하면 어떨까. 지리산 반달가슴곰 재야생화(rewilding) 사업을 아실 거예요. 재야생화는 생물의 상태를 원래 야생이었다고 가정하고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점의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하는 일이에요. 멸종이 되었거나 그 장소에 더 이상 살지 않게 된 생물을 과거에 살았던 곳으로 재야생화를 하면, 바뀐 환경 안에서 그 생물들에게 여러 부작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어요. 웅담 채취를 목적으로 가축화한 곰과 복원사업에서 풀어 놓은 곰이 서로 섞이기도 하는데, 이런 상황을 우리가 완벽히 통제하기 어렵고요. 곰처럼 눈에 띄는 큰 생물도 그러한데 수많은 씨앗과 꽃가루, 박테리아와 미생물 같은 많은 생물들을 우리가 길들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겠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방식으로, 이들은 완전히 다른 네트워크를 가지면서 이 세상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반면, 특수 목적으로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생물은 쉽게, 빨리 번식하고 조작하기도 쉬워야 경제적이에요. 이런 조건에 맞추다 보면 초파리나 애기장대처럼 이미 인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앞서 질문에서 언급하신 개념대로 반 정도는 이미 길들여진(domesticated) 생물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생물에 적용하는 기준은 사람의 주관적 결정과 관습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렇게 도구나 자원으로 쓰는 생물이나, 그렇지 않고 자연을 복원하려고 풀어놓는 생물들이나, 어쨌거나 다 사람의 손과 의지와 통제 속에 있기도 해요.


이미지와 지식이 어떤 맥락에서 활용, 수용되는지, 그것이 바로 가지 펼치기 아닐까요? 과학과 예술의 경계, 인간과 초파리의 경계를 넘어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었습니다. 초파리의 근육이 가진 미세한 규모도 사실 우리 안에서 있는 거겠죠.


맞아요. 인간과 호환될 수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모형생물을 연구하는 것이겠지요.


1. The Mütter Museum, accessed April 30, 2020, http://muttermuseum.org .

2. The current museum description has been revised to state that it aims to "help visitors understand the mysteries and beauty of the human body and appreciate the history of diagnosis and treatment of disease." The Mütter Museum, "Visit: Disturbingly Informed," The Mütter Museum, accessed April 30, 2020, http://muttermuseum.org/visit/ .

3. Francesco Valesio & Odoarado Fialetti, "Tabula IIII" in Adriaan van de Spiegel, 'De foetu formatu liber singulars,' 1645, copperplate engraving, The Wellcome Collection, CC 4.0 International BY-NC-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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